배명사역과 어머니기도회를 통한 은혜

1. 시작하실 당시의 상황이나 그때의 마음을 나눠주세요.

먼저 배명학교에서 예배 드리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학교라는 거대한 전도 장소, 특별히 남학생 아이들에게 복음을 들려줄 기회가와서 너무 좋았습니다.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학생과 더불어 학부모까지 좀더 체계적으로 예수님을 전할수 있을거란 기대가 많았습니다. 그 기대에 맞추어 학부모 어머니기도회가 3월에 생기고 월요일마다 예배를  두란노홀에서 드리기 시작했고 그 기도회에 교회문 열어주다보니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들에게 자녀들 성경공부를 하면 좋을것 같다고 제안하고 점심시간 50분을 활용해서 모이면 될것 같아 오고가는데 10분, 성경공부 30분,  식사 10분으로 점심은 덮밥으로 60~70명을 섬김이 시작했습니다  그때 만난 선생님은 윤영석선생님으로 지금까지 담당하고 계시고 학교대표로 화명회 회장인 황영림집사가 교회는 다르지만 많은 섬김을 해주었습니다

학교급식보다 맛있다고 소문나서 교감선생님으로 계시다가 교장선생님으로 퇴임하신 박병철교장선생님과 7~8분의 선생님들이 식사를 하러 오시어 검증도하고 결국 1년 후에 CCM반을 만들어 학교 특별활동 정식 수업으로 되었고 간식을 주기 시작하면서 배명사역팀이 시작되었습니다.

2. 인상 깊었던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배명사역팀이 생기기 전부터 몇집사님들과 입학식 졸업식때 뜨거운 차를 대접하기 시작하여 교회 전도지와 학교안에 교회가 있다고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배명어머니기도회에서 학부모 총회때는 작은 간식을 정문에서 주다 1000개의 수세미를 떠서 비전홀 앞에서 교회전도지와 물티슈를 선생님들과 같이 나누어줄 수 있었는데 힘든줄도 모르고 떴던 수세미, 추운줄도 모르고 차를 나누어주던일. 학교라 전도지를 잘받아주기도 했지만 늘 조심스러운 것은 학교다보니 말이 생길까바 조심하며 기도를 더욱더 간절히했습니다.

배명어머니기도와 함께했던 것은 학부모들이 있어 믿지 않는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에게 교회만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반대를 막기위함이었습니다.

배명사역팀이 생긴후부터 입학식에만 차를 나누며 부활절엔 계란을 신년엔 달력을, 어느해에는 수능전엔 떡을 전교생에게 준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반대하던 선생님들도 교회를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학교와의 관계도 더욱 친밀해졌습니다. 그리고 신우회도 생겨 기도하는 선생님들이 늘어나기 시작을 했고 기독교반을 맡은 사역자분들이 바뀌며 많은 애로사항도 있었지만 윤영석선생님과 장주창목사님이 지금의 김대만목사님을 세우셔서 감사했습니다.

기독교반이 종교라 제한을 많이 주어 CCM밴드반으로 바꾸었는데 교육청에서 한글로 바꾸라고 하여 음악사랑연주반으로 바꾸었습니다.

3. 받은 은혜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비록 우리의 계획과 열매로 보이도록 일하시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눈을 들어하나님의 일하심을 묵상해보면 아무 상관도 인연도 없었던 우리를 부르시고 이곳에서 학생들을 섬기게 하시고 이끌어 가심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동안 아픔도 슬픔도 있었지만 그 고난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배명어머니기도회는 지금도 하고있고 코로나전까지 모였던 부모님들의 아이들은 명문은 아니어도 대학도 취업도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세대로교회에서 배명중고에 많은 자녀들이 가서 배명어머니기도회로 학교에 힘이되고 그리스도의 학교가 되고 배명에 오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학교에 써있는 빛과 소금이 되고 세대로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만난 세대로교회

제가 세대로교회로 인도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이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20년이 넘게 섬기고 장로로 세움받은 교회를 여러가지 상황으로 몇년간의 기도와 갈등 속에서 2002년 12월 마지막 주일을 끝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2년 정도는 교회를 정하지 않고 여러 교회를 탐방하려 했으나 다른 교회는 가보지도 못하고 두달이 못되어 세대로교회에 등록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세대로교회를 찾게 된 것은 개인적인 몇 가지 간증이 있지만 생략하고 2003년 1월 영동여고 강당에서 양승헌 목사님의 구약 파노라마 집회가 있다는 홍보지가 저희 집 신문 속에 들어왔습니다. 이 소식지를 접하고 수요일 저녁시간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말로 표현하기 어렵게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시작 시간보다 훨씬 먼저 영동여고 강당을 찾았는데 제일 먼저 마주친 분이 양승헌 목사님이셨습니다. 첫인사가 “아는 분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내심 처음인 것처럼, 초신자인 것처럼 행동하려 했으나 거짓을 말할 수 없어서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몇주 뒤, 2월 둘째주에 정식으로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갈등과 혼란을 겪던 저와 우리 가족은 하루하루 한주 한주가 천국의 기쁨과 감사였고 은혜였으며 그렇게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교회 초기에 공식적인 새벽예배가 있기 전에 새벽시간에 있었던 교육프로그램인 성경공부가 있었는데, 그것이 후일에 많은 역할을 했고 정말 좋은 기회였고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함께 했던 김용원 목사님, 심광섭 목사님, 박성은 목사님도 많이 생각납니다. 물론 장주창 목사님과 김상기 목사님은 더 말할 나위 없고요.

제 인생에서 잘한 선택 몇 가지를 말하라 하면 세대로교회에 등록한 것과 양승헌 목사님을 만난 것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세대로교회에서 인생의 숙제를 다한 것 같고 장로 은퇴를 한 것도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저의 선택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고 하나님의 강력한 손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감당 못할 은혜, 버스킹 전도

버스킹 전도를 섬기시게 된 계기나 시작할 때의 마음

저는 25살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전까지는 안티 크리스천이었어요. 기독교를 싫어했지요.

대학을 입학한 후, 20대를 시작하면서 음악을 했어요. 홍대에서 인디 밴드를 만들어 5년 간 음악을 했습니다. 건강하게 음악만 하면 좋았겠지만, 술과 담배, 온갖 유흥에 찌들어 살게 되었습니다. 25살에 밴드를 해체하고, 폐인이 된 채 학교 복학도 어려울 만큼 피폐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자살을 생각하다가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어요.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제가 그 깊은 어둠 속에서 음악을 했던 시간도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찬양 사역이었지요. 원래 음악을 좋아하던 저였기 때문에, 신앙을 갖게 된 후 찬양을 하는 것은 저에게 큰 기쁨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서 노방 전도하는 어느 교회 찬양팀을 보았습니다. 여러 명이 옆으로 쭉 서 있고, 맨 마지막에 양복입은 어떤 아저씨가 기타를 메고 있었지요. 누가 봐도 거리에 나와 전도하는 전형적인 교회 찬양팀이었어요. 그들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지만, 아무도 그 찬양을 듣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누군가 들었을 수 있지만요)

그때 생각했던 것이 ‘버스킹 전도’였어요. 일반 교회 찬양팀이 하는 방식 말고, 독창 혹은 중창으로 음악이라 할만한 멋진 찬양을 세상에 들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팀을 하나 만들었어요. LNF라는 팀이었어요. Lost & Found라고 ‘유실물 센터’를 뜻하는 말이에요.

제가 캐나다에서 정말 소중한 자켓을 잃어버렸을 때, 바로 이 Lost & Found에서 그 자켓을 찾았거든요. 그때 그 자켓을 다시 찾고 나서 정말 감사해서 감사 기도를 막 했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언젠가 나를 위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오는 Lost & Found를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마음에 감동을 주셨어요. 그 생각이 나서, 바로 LNF로 이름을 짓고, 팀을 만들어서 거리 찬양사역을 시작했어요.

거리에서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드리는 ‘유실 영혼 센터’가 되고 싶었던 겁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술 취한 대학생이 가장 많은 신촌 거리 한복판 공원으로 나가서 찬양을 했어요. 제가 술 취해서 뒹굴던 신촌 바로 그 거리에서 저와 같이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찬양을 들려주고 싶었어요. 일반 사람들도 귀를 기울이고 듣고 싶을 그런 진짜 아름다운 찬양을 들려주고 싶었어요. 부르는 우리가 은혜 받기보다, 듣는 누군가가 은혜 받길 바라면서요.

한 팀이 찬양하고 연주하는 동안 다른 팀들은 사영리를 들고 공원을 돌며 전도했어요. 공연하던 팀이 내려오면 그 팀이 사영리로 전도하고, 전도하던 다른 팀이 올라가서 공연하고요. 제대로 된 음악과 연주를 보여주니 사람들이 우리 앞에 앉아서 음악을 들었어요. 맥주를 마시면서 듣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 그래도 괜찮았어요. 복음을 담은 가사가 그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요. 약 2년 간 LNF 거리 찬양 사역을 하면서 정말 많은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어요.

 

 

 

 

 

 

 

 

버스킹 전도에 참여하시는 가운데 인상 깊었던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제가 신촌 공원에서 LNF 거리찬양 사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 저희를 참 어렵게 했던 노숙인 분들이 계셨어요. 그 공원 한 가운데 모여서 늘 술판을 벌이고 계셨던 노숙인분들이 저희가 공연할 때 정말 많은 훼방을 놓으셨어요. 술병을 던지시기도 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하셨어요. 자매들이 워낙 무서워해서, 저는 장소를 옮겨야 하나 고민과 기도가 많았어요. 

그 중 한 분이 거의 대장님이셨는데, 다른 노숙인들은 계속 바뀌어도 그분은 거기 상주하셨어요. 그분은 막 저희한테 뽕짝 한 번 불러 보라고 주정을 하시기도 하고, 저희가 무시하고 찬양하면 또 행패를 부리시고 그러셨어요. 제가 그분들을 주로 마크했는데, 빵이랑 음료 같은 것을 사가지고 가서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그렇게 좀 맞춰드리면 공연을 못하게 하진 않으셨어요. 어느 날 그 대장 노숙인 아저씨가 술을 먹다가 쓰러지셨어요. 제가 달려가서 아저씨를 끌어 안았고, 저희 팀원들이 약국에 뛰어 가서 약을 사다가 먹여 드렸어요. 그때 다른 노숙인 아저씨들이 우리에게 굉장히 고마워하셨어요. 그 일이 노숙인 아저씨들과 가까워진 큰 계기가 되었지요. 

그중에서도 그 대장 노숙인 분과는 정말 가까운 친구가 되었어요. 그분의 존함도 알게 되었지요. ‘신정도’ 아저씨였어요.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 분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군에 간 아들이 하나 있는데, 가족들 버리고 온 애비라 볼 낯이 없다고, 그런데 너무 보고 싶다고.. 그러시면서 하염없이 우셨어요. 저도 듣다가 같이 울었어요. 제가 그 아저씨에게 간증을 나누었어요. 나도 알콜 중독자로 자살하려다가 예수님 만나서 다시 살았다고, 아저씨도 예수님 믿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요. 그리고 정도 아저씨에게 우리 모든 팀이 손을 얹고 공원 한 가운데서 기도를 해드렸어요. 그 거리에서 우리는 얼마나 눈물 쏟으며 그분을 위해 기도했는지 몰라요. 

그 이후로는 수요일에 우리가 악기를 메고 공원으로 가면 정도 아저씨가 멀리서부터 소리치며 반겨 주셨어요. “우석아!!!” 

제가 다른 일정으로 못 가는 날에는 팀원들에게 저는 왜 안 왔냐고 꼭 찾으셨어요. 다음 주에 가면 지난 주는 왜 안 왔냐며 핀잔을 주기도 하셨어요. 정도 아저씨는 다른 노숙인 아저씨들이 술 먹고 우리에게 시비를 걸면 중간에서 말려 주시기도 하고, 우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셨어요. 물론 매번 소주 한 병만 사달라고 조르시는 것을 거절하기가 참 힘들었지만, 대신 순대국도 사드리고, 빵이랑 우유도 사드렸어요. 생크림을 입에 가득 묻히고 빵 드시던 아저씨는 얼마나 행복해하셨는지 몰라요. 

저는 잠실 세대로 교회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신촌 거리에서 생활하시는 아저씨를 교회로 초청하긴 어려웠어요. 그래서 저희 팀원 중에 신촌 성결 교회 다니는 친구를 소개하면서 교회 한 번 가보시면 어떻냐고 아저씨께 권했어요. 냄새가 좀 나고 더러워도 교회 다니기 시작하시면 도움받으실 수 있을 거라고요. 아저씨는 부끄럽다고 못 가겠다고 하셨어요. “그래도 나중에 우석이 봐서 꼭 한 번은 가 볼게”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한 두 달 후, 주일에 그 팀원에게 전화가 왔어요. 아저씨가 교회 오셨다고요! 그리고 정도 아저씨 전화를 바꾸어 주었어요. “우석아! 아저씨가 그래도 약속 지키는 사나이지?” 나중에 그 팀원에게 들었는데, 어디 가서 좀 씻고 정갈하게 하고 오셨다고 이야기해 주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거리 찬양을 마무리하고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아저씨도 언제부턴가 그 공원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셨어요. 지금도 많이 생각나고 보고 싶은 분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 정도 아저씨를 꼭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버스킹 전도를 통해 받은 은혜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

세대로 교회에서는 ‘하소연’이라는 팀을 꾸려서 삼전 사거리에서 버스킹 전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소연’은 ‘하나님의 소리를 연주한다’는 뜻으로, 세상 사람들의 걱정근심 가득한 하소연이 찬양을 통해 치유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교회에서 버스킹 전도를 나가는 경험은 처음이었는데, 세대로 교회에서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이 반가웠고 감사했습니다. 

그때 거리에서 찬양했던 곡 중 하나가 홍이삭 님의 <하나님의 세계>라는 찬양이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곳이라 주님의 세계는
정말로 내가 나같고 솔직할 수 있는 곳
조금이라도 내 의라 말할 수 없는 이곳
이곳은 바로 주님의 세계라

세상은 항상 말하네 그 길이 아니라고
곱디 고운 길이 있는데 왜 힘들게 사냐고
단순한 선택조차 내게 버겁기만 한 곳
그래도 나는 주님만 따르리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더 깊도다
더 깊도다

나는 계속 걸어갑니다 수 없이 넘어져도
사람들의 방향과는 조금 다르다 해도
내가 가는 길이 주가 가르쳐준 길이니

이곳은 바로
이곳은 바로
이곳은 바로 주님의 세계라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거리에서 이 찬양을 부르는데,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거리에 나와 찬양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펼쳐 나를 안아 주시는 듯했습니다. 입사한 이후, 거리에 나와 버스킹 전도를 할 기회가 많이 없었는데, 다시 거리에서 찬양을 하는 내 모습이 행복했습니다. 

찬양 가사대로 세상 사람들의 방향과는 다른 길을 가며 수없이 넘어지고 좌절하지만, 나는 여전히 푸른 하늘 아래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회사 업무로 바쁜 일상에 쫓기던 제 삶에 복음을 향한 야성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가 신촌에서 거리 찬양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내와 아들 은성이가 내 앞에 서 있었습니다. 둘째 은율이는 태중에 있었고요. 제가 청년 시절 신촌에서 거리 찬양을 할 때는 지금의 아내가 여자친구였을 때였습니다. 그때 아내는 찬양팀 맴버는 아니었지만, 제가 없을 때도 용기를 내어 정도 아저씨에게 빵을 사다 드리곤 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우리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버스킹 전도를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복음을 전하러 가는 자리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버스킹 전도는 내 안에 복음을 더욱 뿌리내리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거리로 나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찬양을 하는 그 순간이 아니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과 눈물을 내 가슴에 담을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가 영적 전투의 최전방에 설 때, 세상을 구원하시려 독생자를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위대한 사랑이 내 온몸을 통과해 흘러가는 감당 못할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첫째 은성이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둘째 은율이도 6살이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거리는 아니지만, 세대로 교회 20주년을 맞이하여 온 가족이 처음으로 찬양하러 무대에 섭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야기’라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은 찬양을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부르려고 합니다. 자살의 문턱 앞에 서 있던 어느 청년 폐인을 하나님께서는 거리에서 찬양하는 사람으로 불러 주셨고, 이제는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보내주셔서 함께 찬양하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또 시간이 많이 흘러, 저는 백발의 노년이 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자라서 가정을 이루겠지요. 그리고 또 그때 나는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지금처럼 지나온 시간 은혜의 감격을 곱씹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겠지요. 

마침내 이 땅을 떠나 천국에 가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여전히 찬양을 그분께 올려드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과는 다른, 영원의 장소에서, 완전한 모습으로요! 여전히 나의 찬양을 받으시는 우리 주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올려 드리며 글을 맺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대로교회를 만나게 한 전도지

2006년 시월.

몸과 마음이 곤고하던 가을에 세대로 교회를 만났습니다.

1년여 동안 섬길교회를 찾으며 방황하던 저의 집 우편함에 세대로교회 전도지를 보았고 성령의 강한 인도하심으로 시월 둘째 주일에 배명고 강당에서 첫 예배를 드리는 세대로교회 성도가 되었습니다. 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양승헌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메말랐던 저의 심령이 회복되었습니다. 하늘가족 공동체 안에서 훈련을 받으며 성장하는 은혜를 누리고 멘토로 다음세대를 섬기면서 함께 자라가는 기쁨과 감사를 누렸습니다.

너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시어머님을 천국에 보내드리고 사십대 중반에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버린 친정동생. 오십대초반에 암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난 시동생. 그 힘들고 아픈 시간들을 세대로공동체의 위로와 격려, 사랑으로 이길수 있었습니다.

삶은 여전이 버겁고 고단하지만 날마다 세대로 안에서 누리는 말씀의 은혜와 공동체의 사랑으로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들의 미래인 다음세대와 함께 저는 오늘도 자라고 있습니다.

세대로 안에서.

새생명을 얻은 새생명축제

나의 고향은 절로서 유명한 합천 해인사이다. 그래서 성장과정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절에서 생활한 적도 있으셨다. 그래서인지 항상 종교 관련 대화를 하면 불교가 대부분의 주제였다. 따라서 어린 시절 기독교는 크리스마스종소리 정도로만 기억을 하고 그 외에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더 나아가 동네 어르신들에게 항상 기독교는 편협적인 대상이기까지 했다. 나 또한 위로 누님이 세 분이 계시는데, 둘째 누님께서 기독교 집안으로 시집을 가 집안 제삿날에 오면 제사를 지낸 후에는 항상 싸움이 일어나 그런 모습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 항상 좋지 않은 감정으로 느꼈었다.

성인이 되어 공수특전단에 입대하여 힘들고 어려운 병영 생활을 하였다. 전역 후 나는 1988년도에 관할 구청으로 정화조 청소 대행을 하는 사업장에 취업하였다. 동료들은 어렵고 힘들다며 푸념과 불만을 내뱉었고, 일을 하다가 그만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어려운 병영생활 경험 때문인지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어려움이 조금도 없었다. 그리하여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여 대표이사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2001년도에 노동조합이 생겨 힘든 일이 반복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와 자괴감 등으로 나 자신을 포기할까, 이직을 하여 새로운 사업장을 다시 할까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어느 날 운전 중에 차 안에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마비 증세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응급실에 실려가게 되었다. 후에 병원에서 공황 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런 도중 2006년도 신성문 장로님으로부터 태신자 카드를 건네어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2007년 4월 1일 세례를 받고 지금까지 열심히 교회에 나올 수 있었다. 인생의 중요한 길목에서 장로님의 진정성 있는 권유가 없었더라면 나는 주님의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며, 오늘날의 집사로서 세대로 교회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이처럼 누군가를 위한 바나바가 되기 위해 삶을 머리 위에 놓고 매듭 위에서 펼쳐지는 크리스천 됨을 알며 그 가치와 의미를 나의 마음 속에 새겨갈 것이다.

처음에 교회에 다닐 때는 목사님의 설교가 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니 어느 순간 설교가 내 마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착하게 살면서 사람들에게 욕먹지 않고 주어진 삶에 충실하면 되겠지 라는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 후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반드시 삶의 영역을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랑과 지혜, 겸손과 양보로 더욱 믿음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믿음으로 생활하면서 제자훈련, 사역훈련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는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시다.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는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등지고 죄에 빠짐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수 있는가, 우리가 세상에서 환란과 공허와 어둠을 겪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질서와 충만, 그리고 빛이 생겼다. 예수님은 우리와 나와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셨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제자훈련의 장주창 목사님과 사역훈련의 양승헌 담임 목사님은 나의 생애에는 잊을 수 없는 분이 되셨다. 그리고 사역훈련 수료식날 로마서 8장을 외우면서 복음에 대한 진한 감정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다.

빛이 어둠을 비추었으나 그 빛이 밝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밖에 서성이지 말고 들어오라 하였다. 문안에서 평화와 질서를 이루기 위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문 밖의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전도폭발훈련을 시작할 것이다. 송한종 장로님과 함께 좋은 믿음으로 매진할 것이다.

전도폭발훈련을 통해 받은 은혜

전도 폭발 훈련이 주보에 실렸을 때 마음속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 땅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설 때 몇 명이나 전도 했느냐고 물으시면 머뭇거릴 수 밖에 없겠다 하는 두려움. 또 한편으로 예전에 전도훈련이라 하여 참여 했는데 짧은 시간 제대로 훈련이 안된 상태에서 첫날부터 노방전도를 실시하여 난감했던 경험으로 마음의 부담이 요동쳤습니다.

전도는 항상 부담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사탄이 가장 싫어 하는 일을 해 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전도폭발 훈련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어 좋으니까 그 말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12주 전도폭발 훈련을 통하여 쳬계적으로 배우고 나니 무조건 믿으라는 전도는 바른 전도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왜 믿어야하는지 근거를 제시하고 바른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과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물론 여전히 반대하는 의견들에 대해 잘 대처할 수 있는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훈련을 마치면서 세대로교회 전도폭발 1기 훈련생으로 교회의 본이 되어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이번 훈련을 통하여 그리스천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강력한 복음의 무기를 장착했다는 든든함이 생겼습니다.

사실 이번에 훈련 받으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정말 신실한 믿음이 있어 보이던 사람도 영생을 가졌는지 물으면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이 전도폭발훈련과정이 교회의 훈련과정으로 자라 잡았으면 좋겠고 또 할 수 있다면 멘토님들의 필수과정이 되어 다음세대에게 정확한 복음이 제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번 훈련이 끝나갈 쯤에 남쪽에 2박3일 일정으로 여행을 갈 기회를 얻어 진도에서 군대 동기를 만나 관광지를 같이 다닐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앙 이야기를 꺼내 만약 오늘이라도 이땅을 떠난다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물으니 착하게 살았으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면서 말을 흐리는 것을 듣고 이 친구에게 가장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겨 복음의 핵심을 훈련 받은대로 정확히 전하고 나도 한 때 친구처럼 착하게 살면 되지 했는데 착한 것의 기준이 세상이 말하는 착함이 아니라 성경은 이렇게 죄를 정의하지…….이런 기준으로 볼 때 친구는 하루에 몇 번이나 죄를 짓고 산다고 생각하는가 물으니 많이 짓고 사는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한다네 이렇게 순순히 거부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여행 말미에 세대로 교회에 수년간 같이 섬긴 김승권목사님, 정영미 사모님이 진도에 내려가셔서 삼막제일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기에 차안에서 복음을 전한 친구가 신앙 생활을 잘 했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혹시 삼막제일교회 아냐고 물으니 친구가 교회 있는 곳을 알고 있었습니다 친구와 같이 찾아 가서 뵙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이 친구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이 복음이 잘 자라게 목사님께 부탁드린 것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이 전도훈련 받은 것을 실습하라고 예비해 두신 것임을 간증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번 훈련을 통해 저의 신앙도 점검하고 예수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위한 가장 큰 복음의 무기를 장착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많은 성도님들이 이 훈련에 참여하여 저와 같은 은혜를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이 훈련을 위하여 수고하신 홍문균 목사님과 훈련자로 참여한 김지태, 한대우 목사님, 훈련생으로 같이 참여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그리고 기도 후원자님께 감사드립니다.

두서 없이 나눈 이야기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전도폭발 훈련을 마치고

“전도폭발 훈련”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평소에 복음을 잘 전달하면 좋겠다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는지 관심이 있었습니다. 훈련일정이 월요일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이번은 기회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전도” 라는 부담감이 있는 주제여서인지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며칠후 담임 목사님에게 한통을 전화를 받고 훈련일정이 토요일로 바뀌었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훈련 참가 권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평소 목사님께 배운데로 네! 그리하겠습니다.로 답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저의 영적 전쟁은 시작 되었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첫날부터 코로나로 인해 교육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무슨 토요일마다 평소에 없던 약속은 많이 잡히는지….. 두 번째 시간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현장 훈련을 참석하게 되었고, 어색함은 여전했으며, 훈련시간은 왜~이리 긴지 힘들기만 했습니다.

세 번째 시간, 드디어 주님의 터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제시 훈련중에 지난 수십년간 무심코 지난간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자는 영생을 얻었나니(요한복음 4:47)”라는 말씀이 설레이고 가슴 깊은 찐한 감동을 느꼈고, 이 말씀을 저를 통해 전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리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차례의 현장실습을 통해 우리 주변에 신앙이 좋을 것이라고 알고 지냈던 분들도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에 놀랐고, 우리 주변에 많은 분들에게 복음제시가 필요했으며, 저를 포함한 많은 교우 분들도 신앙의 재정비가 필요함을 새삼 느겼습니다. 주님은 이 사역을 기대하시며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죄 많은 인간인지라 항상 뜨겁고, 기대만 가득했던 것은 아닙니다.

노방전도를 계획하고, 상당히 긴 복음제시 문구들을 보며, 부담감이 없다하면 거짓말입니다. 복음제시 문구들도 여러번 보다보니 입에 익어갔지만, 옆에 계신 송장로님의 수첩을 보며, 저렇게 열심히 하시니 장로 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짧지 않은 12주의 훈련시간을 통해 체계적인 복음제시 방법을 알았고, 상황에 따른 대처 방법을 통해 전도에 대한 막연함이 거쳐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한 학기 동안 지도해 주신 홍문균 목사님과 1기 훈련생들이 있었기에 COVID-19로 어려운 상황에서 전도폭발 훈련이 은혜와 기쁨으로 가득했었습니다. 또한, 훈련자 김지태 목사님과 두분의 기도 후원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훈련이 끝난 후에도 함께 공부하고 배운 복음의 말씀을 내 주변의 가족 형제부터 먼저 전하며 하늘 나라의 확장의 도구로 살아가길 기도하며 기대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